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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칙칙폭폭 기차여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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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의 묘미 중 으뜸은 뭐니 뭐니 해도 기차여행이었다. 그것도 삐익∼삐익∼기적을 울리고 검은 연기를 뭉클뭉클 뿜어 올리며 칙칙폭폭 내달리던 증기기관차 여행이었다. 1967년 8월31일 한국 철도의 현장에서 공식 퇴역하기 전까지 증기기관차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에게 꿈과 낭만의 표상, 바로 그것이었다.

 

시골 아이들은 푸른 산등성이에서 불쑥 삐져나와 긴 여운, 기적소리와 함께 들판을 가로지르는 기차를 보며 도회지에의 무한한 동경을 키웠다. 서울 변두리 아이들은 앞바퀴에서 헐떡이듯 흰 수증기를 내뿜으며 한강철교 위를 달리는 기차를 보며 시골 할머니 집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느꼈다. 가슴을 헤집듯 뭉클뭉클 뿜어 나오는 화통 연기처럼 도무지 주체할 길 없는 그리움이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쌩쌩 달리는 묘미, 객차 승강구의 ‘특등 입석’

 

 

봄가을엔 서울 가서 돈 벌어 돌아오겠다며 무작정 상경하는 소년소녀들이 그 기차를 탔다. 역두(驛頭)에서 눈물로 이별한 친구의 격려를 생각하며 기차 안에 앉아서도 그들은 입술을 깨물었다. 반면 여름과 겨울에는 서울 부모가 아이들에게 주는 최고의 방학선물이 시골집 행 기차표였다. 힘들고 각박한 서울생활에 지친 부모일수록 아이들을 푸짐하고 넉넉한 시골에 잠시라도 보내고 싶어 했다. 기차 안에서 아이들은 설렘에 달뜬 얼굴로 연신 조잘댔다. 물론 부모와 함께 갈 경우엔 천군만마라도 얻은 듯 의기양양했다.

 

그렇긴 해도 머리가 좀 큰 아이들은 객실 안에 얌전히 앉아가지만은 않았다. 웬만한 어른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승객들로 꽉 차 비좁고 냄새 나는 객실, 딱딱한 나무 의자보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쌩쌩 달리는 묘미를 한껏 느끼게 해줄 객차 승강구의 ‘특등 입석’이 훨씬 인기였다. 두세 칸 발판에 대여섯 명씩 난간을 잡고 매달려 서서 가노라면 스쳐 지나는 논밭과 산의 청기(淸氣)가 가슴 가득히 파고들었다. 기차 타는 맛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는 시원한 바람이었다.


휴일 교외선 공포..초만원
1972. 6. 12 [동아일보] 7면

 

 

 

위험을 안고 "여름"을 달린다
1981. 8. 1 [경향신문] 1면


기차는 터널에 들어가기 전이면 으레 기적을 울렸다. 석탄 그을음과 연기가 객실로 날아들지 모르니 미리 창문을 닫으라는 신호였다. 물론 승강구에 매달린 승객도 차 안에 들어가 있으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그러나 ‘특석’을 빼앗길까 두려운 사람들은 난간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기차가 터널을 빠져나오면 그들의 얼굴은 새카만 검댕으로 얼룩지기 일쑤였다. 손으로 문지르기라도 하면 영락없는 토인 전사의 얼굴이 됐다. 그래도 옆 사람과 낄낄대고 웃으면서 세 시간 네 시간 아랑곳없이 기차 옆구리 여행을 즐겼다.

 

객차 한 량 당 4개 승강구에 20여 명이 매달린다면 열다섯 량이 달린 기차의 경우 3백여 명이 ‘난간 승객’이었던 셈이다. 한때 유행한 식인종 시리즈 농담을 차용하자면 “김밥(까만 기차)이 군데군데 터져 흰색 쌀(사람)이 삐져나온” 형국으로 기차는 우렁찬 기적을 울리며 달려 나갔다. 물론 안전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매년 10여 건 이상 추락사고가 일어났다. 그 대부분은 학생 등 젊은이들이 승강구 난간을 잡고 가다 떨어져 숨진 사고였다.

 

 

 

 

승강구 사고 날 때마다 배상 둘러싼 논란

 

 

증기차시대는 물론, 67년 9월 시작된 ‘디젤기관차 시대’에도 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63년 1월 승강구 발판에 서있던 40대 여인이 열차 출발순간 날치기가 목도리를 낚아채는 바람에 철로에 떨어져 숨졌다. 67년 여름 중3 남학생이 한 손엔 책가방을, 한 손엔 난간을 잡고 가다 한강교각에 부딪쳐 사망했고 78년 추석에는 기차가 역 구내에 들어서는 순간 빨리 내리려는 승객들이 승강구로 몰려 매달려있던 초등학생이 떨어졌다. 80년 경남 양산에서는 초등학교 6학년, 4학년 형제가 열차가 자기 마을 앞을 지날 때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다 떨어져 숨졌다.

 

승강구 사고가 날 때마다 배상을 둘러싼 논란도 일어났다. 1969년 서울민사지법은 “만원 열차에서 승강구 발판을 딛고 난간에 매달려간 사람이 추락사한 경우, 국가가 주의의무를 소홀히 했으므로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같은 해 “특급열차 승강구에서 추락사한 경우, 스스로 신체 안전조치를 취하지 않은 과실이 크므로 국가는 배상할 필요가 없다”거나 “만원이 아닌 열차에서 승강구에 매달려가다 떨어져 죽은 것도 피해자 과실이기 때문에 국가가 배상할 이유가 없다”고 판시했다.

 

반면 82년에는 “술 취한 승객을 승무원이 차내로 유도하는 등 안전조치를 취했더라도 취객이 승강구 난간을 잡고 가다 추락사했다면 국가는 50% 정도의 배상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결도 나왔다. 사고책임과 배상을 둘러싼 논란이 일 때마다 승무원들은 난간승객들을 모두 객실 안으로 밀어 넣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한 시간에 두어 번씩 순찰을 돌며 승강구 승객을 ‘해산’시켰다. 하지만 그때뿐, 승무원이 다른 칸으로 넘어가기 무섭게 승객들은 바로 난간으로 나와 ‘맞바람 특석’의 묘미를 즐겼다.

 

 

 

 

낭만 되살리자는 극한론에 증기기관차 재등장

 

 

어찌 됐거나 67년 증기기관차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기차여행의 낭만도 함께 사라지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없지 않았다. 그 해 8월31일 오후 1시50분, 새벽에 전북 남원을 출발한 ‘파시’ 5형, 102보통여객열차가 서울역에 도착해 ‘증기기관차 퇴역 종운(終運)식’을 가진 날 신문들은 매우 감상적인 기사를 게재했다. “증기기관차여, 안녕! 영국이나 미국 같으면 사람들이 ‘올드 랑 사인’을 합창할 일이다. 앞으로는 어린이들이 ‘칙칙폭폭’이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게 되는 것일까.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잔다.…”

 

칙칙폭폭 대신 우∼웅 소리를 내며 달리는 디젤차 독점시대는 그러나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증기차 퇴역식이 있은 지 2년 반쯤 된 70년 1월 철도청은 전주∼군산 노선에 다시 증기차 5대를 투입했다. 외국차관으로 도입한 20년 수명 디젤차가 무리한 운행으로 5년 만에 고장이 나는 등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 물론 증기차는 얼마 안가 다시 디젤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75년부터는 영동 태백 중앙선 등 산업철도가 모두 전철화하면서 디젤과 전철의 혼용시대가 시작됐다.


증기기관차 퇴역 종운식
1967. 8. 31 [경향신문] 3면

 

 

 

이즈음 철도는 새로 개통한 고속도로에 승객을 빼앗기며 국내 최고속, 최대, 최다 수송수단으로서의 매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철도인들 사이에서는 전철시대를 넘어 고속철 도입을 서둘러야 고속버스, 마이카에 맞서 철도운송의 명맥을 유지할 것이란 주장이 힘을 얻고 있었다. 사실 적자라고는 모를 것 같던 철도영업은 70년대 중반에 이르자 ‘만성 적자에 허덕이는 천덕꾸러기’ 지적을 받기 시작했다. 서비스를 개선하고 기차여행의 낭만을 되살리지 않는 한 철도의 미래는 없다는 극한론도 대두되었다.

 

81년 바로 이런 낭만과 서비스 개선 분위기를 타고 증기기관차가 재등장했다. 철도청이 10월1일부터 부산∼경주 동해남부선에 증기기관 관광열차를 투입, 운행을 시작한 것.

 

 

 

"어린이날 만세" 기념잔치 푸짐
1986. 5. 5 [동아일보] 11면


증기차는 모양만 그럴 뿐 발전차가 끄는 형식이었지만 ‘어린에겐 꿈을, 어른들에겐 옛 정취를’ 심어준다는 취지를 들고 나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러나 철도청의 ‘대박’ 욕심은 그냥 욕심에 그치고 말았다. 경주 부산 간 141km를 시속 40km로 3시간에 달리는 이 느림보 기차를 아무리 추억이 좋다 해도 이용하려는 승객이 많을 리 없었다.

 

불과 2개월 운행했을 뿐인데 하루 승객이 2백 명에도 못 미치자 철도청은 이듬해 1월 운행을 중지했다. 7월에는 우등 객차를 보통으로 바꾸고 운행구간도 부산∼좌천으로 단축해 보았지만 승객이 안 들기는 여전했다. 결국 이도 흐지부지한 철도청은 85년부터 어린이날 불우어린이 위문용 증기차를 교외선에 내보냈다. 어린이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영화에서나 봤던 시커먼 기차, 운전실 앞으로 길고 둥글게 누운 원통형 화실이 삐죽 나온 증기차는 꼬마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꼬마들이 즐겁고 신나 하는 걸 지켜본 언론의 보도도 호의적이었다.

 

 

 

 

2010년, 추억의 기차는 단 한곳만 남아

 

 

94년 8월 서울역-수색-장흥-송추-의정부 교외선 노선에 증기기관차가 다시 등장했다. 중국의 장춘 기차공장에서 3억 원에 구입한 이 기차 역시 겉만 증기차일 뿐 속은 디젤인 짝퉁. 검은 연기는 나지 않고 기적소리는 낼 수 있도록 경적기를 달았다.

 

 

 

처음엔 토요일 1회, 일요일 공휴일 2회 운행하다 승객이 없어 토요일 운행은 곧 중단했다. 그래도 추억과 낭만이 깃든 이 칙칙폭폭 기관차의 매력은 여전해 그해 11월5일 이 교외선 열차 안에서 국내 처음으로 열차결혼식도 열렸다.

 

2010년 지금, 달리는 증기기관차를 볼 수 있는 곳은 전남 곡성 기차마을이 유일하다. 구 곡성역에서 침곡역 가정역 13km를 30분 간 달리는데 이것도 겉모습만 증기차지 엔진은 디젤이다. 화통에서 흰 연기를 뿜지만 짝퉁이기 때문에 과거처럼 뭉클뭉클 하늘 높이 올라가지도 않는다. 하지만 섬진강변을 달리는 이 차 안에서 사람들은 옛 정취를 느끼고 추억에 젖는다. 그을음과 검댕 때문에 토인전사가 되곤 했던 승강구 난간 특실 승객들은 어느덧 50을 넘어 60, 70에 이르렀다.

 

검수 중이거나 숨김 처리된 미디어입니다.
글 민병욱 / 전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
1976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편집국 사회1부장, 정치부장, 부국장, 논설위원을 거쳤다.
2009년 7월까지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들꽃 길 달빛에 젖어>가 있다.

추억의 증기기관차 다시 달리다
1994. 8. 22 [동아일보]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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