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말 한국의 경제위기를 몰고온 기장 큰 원인으로 손꼽히는 한보철강 사태. 1997년 한보가 5조 7천억원의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부도처리된데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한보 제국의 창업자는 정태수(鄭泰守, 1923~). 그는 50년대부터 70년대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말단 세무공무원의 위치에서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제도권 안에서만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없던 그 시절, 세무공무원의 위치에서 많은 사업자들을 상대하던 정태수는 소위 검은 돈을 다루는 노하우와 당시 대세로 여겨지는 사업에 관한 정보를 체득하면서 독자적인 회사를 세우고자하는 뜻을 점차 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정태수는 운명론에 관심이 많아 역술가와 접촉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역술가의 한마디에 모든 것을 의존했다 보긴 어렵겠지만 자신의 이름 개명 또는 스스로 결정하기 난해한 문제에 관해서는 소위 말하는 점괘(占卦)에 관한 것에서 참고를 한듯 보인다. 정태수가 오랫동안 해오던 공무원 일을 그만두고 독자적인 한보를 세우게 된 것은 역술가 백운학(白雲鶴)의 이 한마디가 시초가 되었다.
“당신 보아하니 공무원이구만. 얼른 집어치우고 흙(土)의 기운을 받아 사업해.”
“당신은 사업하면 큰 부자가 될 수 있을 거야. 우리나라에 손꼽히는 재벌 말이야.”
반신반의하던 정태수는 역술가의 말에 따라 흙과 관련된 사업으로서 몰리브덴 광산을 헐값에 인수하고 개발하였는데, 마침 일본 수출길이 열림으로서 많은 수익을 창출해냈다. 정태수는 이렇게 확보한 자금을 통해 1974년 3월, 비로소 52세의 늦은 나이에 한보상사를 설립하게 되었고, 한보(韓寶) 제국의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이 된다.
한보는 첫 사업에서 큰 재미를 보자 지인의 제안에 따라 거침없이 아파트 사업에 뛰어들었다. 역술인이 말했던 흙의 기운과도 충분히 상관이 있는 사업이었다. 그때 정태수는 사회분위기를 읽고 강남구 대치동의 토지를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자금을 쏟아부어가면서까지 대량으로 매입하였다. 그리고 대단위 아파트단지를 세우는데 이것이 영동은마타운이다.
은마아파트타운이 세워질 당시만 해도 정부의 부동산 투기에 대한 규제조치를 시행하면서 입주율이 저조했었다. 하지만 오일쇼크의 여파로 부동산이 안정적인 투자처로 꼽히면서 은마아파트 입주율이 급격히 올라갔다. 정태수는 이로 인해 20억 투자로 2000억의 마진을 남기는 기염을 토했다.
창업 6년 만에 재벌에 준하는 위치까지 올라선 한보. 한보를 이끈 정태수는 1982년 스스로 회장의 자리에 오름으로써 그룹의 형태를 어느 정도 갖추게 되었다.
한보는 아파트 사업 외에도 건설사업에 필요한 자재 등을 자체적으로 조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1984년 금호(錦湖:지금의 금호아시아나그룹)에서 매물로 내놓았던 금호철강(후에 한보철강공업주식회사, 이하 한보철강)을 사들임으로써 철과 관련된 사업 분야에도 발을 진출하게 된다.
이후 한보는 대치동 은마의 신화를 재현하기 위해 강남의 외곽 지역인 수서 일대에 토지를 대량으로 매입한 후, 관에 대한 무차별적인 로비를 통해 1990년대 수서택지지구 개발사업에 뛰어드는듯 했으나, 1991년에 이르러 한보가 정관계 인사들과 깊숙이 유착된 비리가 하나하나 드러나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동을 일으켰으니, 바로 이것이 수서사건이다.
이 수서사건으로 인해 정태수는 한보그룹의 회장의 자리에서 내려와 총회장으로 들어앉으며 경영일선에 잠시간 손을 떼게 된다. 정태수는 이후 다시 역술인을 찾게 되는데 그때 점괘에 따르면 통해 흙(土)의 기운이 다했으니 쇠(金)의 기운을 통해 회사를 다시 일으켜야한다는 조언을 받았다고 한다.
한보에서 쇠의 기운이 가장 강한 회사는 바로 철(鐵)과 관련된 사업을 하는 한보철강이다. 한보는 이때부터 한보철강을 주축으로 철강사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는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당시 일관제철에 관한 부분은 공기업이던 포항제철(浦項製鐵:지금의 POSCO, 이하 포철)이 독점하던 시절이었고, 인천제철(仁川製鐵:지금의 현대제철)을 앞세워 철강사업 분야에 진출하려던 현대(現代)의 경우도 자동차, 선박, 건설, 철도차량 등 철이 많이 필요한 사업을 하고 있었기에 일관제철소 건설 의지는 누구보다 강했지만 막대한 자금동원이 필요했기에 사업추진에 신중한 입장이었던데다, 창업주 정주영(鄭周永)의 정계 진출시도로 당시 집권하던 정권과 골이 깊었던 터라 진출의 활로가 사실상 막혀있던 상황.
정태수는 이같은 모든 상황이 철강사업에 진출해야 할 필연적인 운명이라 생각하고 한보의 모든 사업역량을 쏟아부어 충남 당진에 국내 최대규모의 민간제철소 건설을 추진하는데 앞장선다. 업계에서는 현대같은 재벌도 버거워하는 사업추진을 한보같은 신생 대기업이 해낼수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컸었고, 심지어 포철 전회장인 박태준(朴泰俊)은 정태수 같은 사람이 제철사업에 어째서 뛰어드냐는 식의 수모를 당했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1996년, 총회장이던 정태수는 자신의 아들인 정보근을 회장으로 앉혀놓고 본격적으로 철강사업을 진두지휘하였다. 한보의 규모에서는 도저히 어려운 일관제철소 건설사업이었지만, 한보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내겠다는 신념에서 철강사업 추진을 강행하고, 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자금을 차입하였다.
한보가 철강사업을 위해 초기에 차입금을 2조 정도 동원하였으나, 이 차입금은 수년만에 5조 가까이 급격히 불어나게 된다. 때문에 한보는 기업을 유지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이른듯 보였지만, 실상 한보는 당시 금융권이 사실상 관치금융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점을 활용하여 정관계의 요직인사들을 대상으로 꾸준히 로비를 해왔기에 근근히 버텨올 수 있었다.
하지만 1997년 1월, 한보철강은 천문학적인 차입금의 한계를 견뎌내지 못하고 결국 부도를 맞았다. 이윽고 한보철강의 최대주주였던 주식회사 한보를 비롯, 한보의 주요 계열사들까지 잇달아 쓰러지면서 2대 23년만에 철강 제국을 꿈꾸던 한보의 짧은 역사는 이로써 완전히 끝이 나고 만다.
한보의 무리한 차입경영과 그에 따른 도산은 부채비율이 높았던 다른 기업들까지 영향을 미쳐,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쓰러지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급기야 1997년 11월 국제통화기금(IMF)에 경제주권을 내주게 되고, 자동차 사업 등을 통해 국내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오던 기아(起亞), 쌍용(雙龍), 대우(大宇) 등 대형 재벌들까지 단숨에 모두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나마 살아남은 기업들은 도산을 피하기 위해 구조조정, 인력감축, 부실기업 및 사업부 정리 등을 과감하게 단행하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실직자가 발생하였으며, 일자리도 꿈도 모두 잃은 이들은 거리에 내몰려 방황함으로써 많은 국민들이 민생고와 경제고는 겪게되는 사태로 직결되게 하였다.
당시의 한보철강 사태는 국가적 차원의 경제파탄과 민생파탄까지 오게 한 큰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오늘날에 와서도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한보의 주요 계열사들은 대다수 매각 혹은 청산되었으며, 핵심 계열사인 한보철강에서 마무리짓지 못한 당진 일관제철소 공장 건설사업은 철강사업 진출을 숙원으로 여기던 현대차 그룹의 현대제철에서 완성을 해냄으로써 매듭을 짓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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