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황제 40주년 재위식에 쓰일 뻔했던 포드의 A형 무개차등 (펌)
40여년간의 기나긴 재위 기간 중 고종 황제만큼 내외적인 변화의 물결과 치욕적인 사건에 연루되어 풍파를 겪은 임금도 조선조 500년 역사상 드믈 것이다.
더구나 1876년 개항을 맞이한 인천, 군산, 부산 등의 항구로부터 물밀 듯이 밀어닥친 외국인들과 외국 풍물에 기인된 사건들로 천주교 탄압, 갑신정변, 임오군란, 동학란, 청일전쟁, 러일전쟁, 아관파천, 명성황후시해 들이 일어나 고난이 점철된 기간들이었던가.
이런 와중에도 별 큰 변고없이 건강하게 재위 40주년을 맞은 1903년 은 고종황제나 왕실로서는 매우 뜻깊은 한 해여서 이를 기념하기 위한 나라 잔치를 광무대(현 새 문안 교회자리)라는 노천 무대에서 열게 되었으며, 기념 공연을 위해 팔도 광대들과 미기들을 뽑아 미리 장악원에서 풍악과 가무를 연습시키는 준비도 했는데 이날 의식을 명명하기를 '칭경식(稱慶式)'이라 했다.
현 재경부 장관에 해당하는 탁지부 대신은 과거에 해오던 사두마차로 궁궐로부터 광무대까지 가기 보다는 말로만 전해 듣던 자동차를 들여다가 행사 이동 차량으로 사용할 것을 주청했다. 고종은 어려운 나라 살림을 이유로 반대했으나 신하들의 적극적인 주청에 못 이겨, 차량 1대를 수입해 오는 것은 물론 일반 고관 대작들에게도 기념품으로 하사하기 위해 인력거 100대를 일본으로부터의 수입도 지시하였다. 고종의 인가를 받자 탁지부 대신은 당시 미국 공사로 재직하던 알렌에게 승용차 1대를 들여올 것을 지시했다. 알렌은 즉시 샌프란시스코의 자동차 판매상이던 '프레이저'에게 전보를 쳐서 드디어 포드의 A형 4인승 무개차 1대를 들여오게 되었다.선교사이며 위사였던 '알렌'공사는 1884년 한미수교 직후 한국에 와서 선교 활동을 시작한 인물이며, 국내에 최초의 서양 병원인 광혜원을 세워서 고종에게 신임을 받아, 고종 황제의 주치의도 지냈다. 그를 기리기 위해 지금도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알렌관이란 게스트 하우스가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이때는 겨우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발명한 해였으니 비행기가 없었으므로 배에 실어서 인천항까지 온 후, 하역하여 1899년 개통한 경인선 철도를 이용하여, 한강철교(1902년 개통)를 건너 서울역에 내려서 궁궐까지 오느라고 칭경식에는 사용하지 못하고, 칭경식이 끝난 수개월 후에야 도착하였다. 그런데 이후에도 임금님의 행차는 사두마차의 앞뒤에 기마병이 도열하고 문무백관이 뒤를 따르는 위엄이 있어야 하는데, 시끄럽게 소리가 나고, 냄새가 나며, 조그만 몸체에 까불대며 빨리 달리는 자동차는 체신이 없다 하여서 결국 임금님 행차에는 사용하지 못하고 궁궐 안에서 만조 백관들이나 궁인들의 구경거리 신세로 만족해야 했으며 일반인들에게까지 공개되진 못했다. 그러다가 1904년 러.일 전쟁통에 그만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한일합방 후에야 임금의 자동차 행차 목격
그러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던 최초의 차는 어떤 것일까? 1908년에 황실용으로 쓰기 위해 정식으로 수입되었던 두 대의 차가 그 최초이다.(인천 부사에 기록)
그 중 한 대는 고종 황제용 영국제 검정색 '다임러'리무진이고, 또 다른 한 대는 순종 황제용 불란서제 빨강색 '르노'리무진이었다. 이 차 두 대가 배에 실려 인천 부두에서 하역하며 인부들에게 목격된 때가 1908년 여름이었다. 이 후 1910년에 한 대를 더 수입하여 들여온 차가 지금 비원에 전시되어 있는 캐딜락이며 순종과 순종 왕후가 탔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차량 수입 후 바로 고종이나 순종이 차를 타고 행차했다는 기록도 없고, 백성들이 행차 장면을 보았다는 기록도 없다. 다만 한일합방 이후인 1911 년부터 행차 장면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1903년에 알렌에 의해 들여왔던 포드 자동차는 없어졌고, 재미있는 사실은 이때까지 수입된 차들의 생산국가가 미국, 영국, 불란서 3개국이란 점과 당시의 우리나라 내에 영향을 끼치고 있던 열강들 중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던 나라들과 일치하고 있는 사실이 바로 역사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수리하기도 어렵고, 운전도 쉽지 않았던 당시의 사실로 미루어 짐작컨대 굳이 한나라 모델만 3대를 들여올 수 없었던 그 때 그 역사의 진실이 알고 싶다. 한 가지 덧붙여 부연 설명할 사실은 1910년 8월 29일(을사보호조약 체결 후 5년 째 되던 해) 한일합방이라는 강제적 국치일을 맞은 이후 당시 한국 총독으로 부임해 있던 데라우찌의 권고로 1911년부터나 자동차를 타고 행차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한다.
잊지말자! 치욕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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